kakaobank

돈, 에세이를 만나다
내 나이 서른 살, 신용카드를 잘랐다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8명의 작가에게 들어봅니다.
글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다정소감> 저자
서른 살 생일을 며칠 앞둔 주말, 와인 샵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에 결심했다. 신용카드를 없애야겠다고. 분명히 돈을 썼는데 통장잔고는 그대로여서 돈을 썼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 늘 마음에 불안의 얼룩을 남겼고, 그 얼룩들을 깨끗이 지울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날따라 ‘생일이니까!’를 외치며 고가의 와인과 치즈를 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소 충동적으로 신용카드를 없앤 뒤, ‘생활비 통장’에 한 달 예산으로 책정한 돈만 남겨놓고 거기서 인출한 현금과 체크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은 크고 작은 불편이 생겨 조금 후회했지만, 다시 신용카드를 살리지 않았다. 신용카드 없는 몇 달 동안 눈에 띄게 지출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돈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할부? 돈을 쓰는 순간과 빠져나가는 순간의 ‘시차’가 싫어서 기껏 카드까지 없애놓고는 미래의 돈을 끌어다 쓰는 할부를 한다고? 말도 안 돼지. 당장 일시불로 살 수 없다면 그것은 현재의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물건인 거야’
할부와 혜택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도 돈을 모으는 데 한몫했다. 단호하게 외치며 돌아서고 나면 며칠 지나지 않아 구매 욕구가 사라져 ‘안 사길 잘했다’의 상태가 찾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사고 싶으면 계획을 세워 몇 달에 걸쳐 돈을 모았다. 자연스레 명절, 경조사, 친구 생일처럼 지출이 많이 생길 시기에 맞춰 미리미리 예산을 조절해 돈을 모으는 요령도 생겼다. 카드를 없앤 이래 11년간 단 한 번도 할부를 이용한 적이 없고, 이 습관은 지금도 나를 든든하게 떠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카드 혜택의 경우 더 복잡했다. 카드의 전월 실적을 채워 각종 할인을 받으려고 ‘뭘 더 사지?’라고 고민하다가 2만 원 받으려고 9만 원 더 쓰려는 내 모습에 충격받은 후 많이 고쳤지만, 여전히 ‘십만 원 이상 구매 시 만 오천 원 할인!’이라는 말에 더 살만한 물건을 찾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럴 때 등장하는 무적의 단어는 ‘어차피 살 것’. 어차피 살 물건들을 지금 사면 할인도 받고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말 어차피 살 것이었는지.

이런 혜택들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생겼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가끔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한 마케팅적 계산으로 만들어진 ‘소비유도(!) 혜택’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상기해야 한다. 꿀 혜택이 맞지만, 혜택을 받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면 더 이상 혜택이 아니라 ‘미끼’이니 과감히 포기하는 게 맞다.
신용카드 없이 소비를 줄이고 돈을 모은다는, 소박하디 소박한 이것을 재테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하지만 ‘카드테크’도 재테크라고 부르는 마당에 안 될 건 뭐가 있나 싶어 내 멋대로 ‘노 카드테크’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11년간 목돈을 모아 적금으로 묶어 놓았고, 최근 몇 년 사이, ‘파킹통장’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어차피 살 것’을 줄이고 ‘어차피 쓸 돈’을 아껴 남은 돈을 수시로 입금해 모으는 재미를 느끼며 살고 있다. 그때 그 순간 카드를 없앤 결정이 빛을 발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계속 ‘노 카드테크’를 이어갈 생각이다. 미래의 나에게 빚을 지는 일 없이. 미래의 나에게 빛을 더할 수 있게.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