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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에세이를 만나다
인생의 바닥에서 나를 살린 그 노래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8명의 작가에게 들어봅니다.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MBC 라디오 <배순탁의 비사이드> 진행자
돈이 없었다. 철도 없었다. 집은 망했고, 앞날은 희뿌연데도 정신 못 차리는 날이 계속됐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취직도 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월급이 늘어가는 빚과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즈음 현재 음악평론가 및 번역가로 활동하는 친한 동생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참혹했던 이 시절 이 친구의 서재에서 삶의 좌표가 되어줄 작가와 처음 만났다. 작가의 이름은 김훈, 책 제목은 <자전거 여행>이었다.

<자전거 여행>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김훈이 쓴 모든 책을 싹 다 찾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가 쓴 수필을 읽었고, <칼의 노래>를 비롯한 모든 소설을 읽었다. 그가 박래부 기자와 함께 작업한 <문학기행>을 읽은 뒤에는 사진가 허용무 씨가 참여한 책 <원형의 섬 진도>를 읽었다. 그렇다. 나는 김훈이라는 세계 자체를 먹으려 했다. 내 인생 최초의 글 폭식이었다.

그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문장 몇 개가 지금도 내 몸을 둥둥 떠다닌다. 먼저 <남한산성>의 서문 중 다음 문장을 언급해야 마땅하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카프카는 책은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땅을 쩍하고 갈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은 나에게 도끼 정도가 아니었다. 가히 토르의 묠니르요, 스톰 브레이커였다. 저 문장이 뿜어내는 ‘쾅’ 소리와 함께 내 정신은 산산조각이 났다. 충격과 희열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모든 글 쓰는 사람에게 별이 되어준 문장,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저 문장이 곧 횃불이었다. 나는 지금도 인간의 개별성을 깊이 이해하고, 연민하는 작가를 사랑한다. 같은 이유로 글을 무기로 우리를 갈라치는 글쟁이를 대체로 혐오한다.

내 집 사정이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수 있다. 깜깜했다. 아빠와 단둘이 지하에 살았다. 볕이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는 그곳에서 수년을 버텼다. 유년 시절에는 정반대였다. 나는 어렸고, 세상은 장난감과도 같았다. 잘 먹고, 잘 살았다. 상황이 변한 건 대학 시절부터였다. 최소 10번 이상의 이사가 이어졌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당연히 다운그레이드. 먹고 살기가 팍팍해졌다.

다시, 김훈이다. 그의 또 다른 인터뷰를 적는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가 옳다. 한데 문학만은 아니다. 음악, 영화, 미술, 게임 다 마찬가지다. 엄격히 말해 문화예술이라는 건 의식주가 해결되고서야 손에 쥘 수 있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불만이 없지는 않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 한국 사회의 물질에 대한 끝 모를 탐욕, 지긋지긋할 때 있지 않나. 그럼에도 김훈이 강조했듯 그 어떤 예술이든 실재하는 삶보다 위중할 수는 없다. 결단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억하고 있다. 위로가 필요했던 그 시절 만났던 그 노래를 잊지 않고 있다. 바로 그 곡, 안토니 앤 더 존슨스(Antony & The Johnsons)의 ‘Hope There’s Someone’을 들으면서 나는 침대에 누워 대성통곡했다. 그것은 격함을 넘어선, 뼈에 사무치는 듯한 울음이었다. 한데 기묘했다. 어느 순간 눈물이 딱 멈추더니 고개가 위로 들렸다. 창문 너머에서 달빛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던 새벽이었다.

일종의 정화 의식이었다. 구원이었다. “설마 이보다 더한 바닥이 있겠어.” 나는 희망을 희망해보기로 했다. 허리띠를 졸라맸다. 잔고를 최대한 아끼면서 늦더라도 철저하게 미래를 준비했다. 영어를 기초부터 다시 쌓고 대중 음악 역사를 통째로 외우듯 공부했다. 그러던 와중 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가 찾아왔다. 그걸 온 힘을 다해 붙잡았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결론이다. 나는 문화와 예술이 돈과 지갑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돈을 우습게 보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우습게 본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돈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된다. 경험에 의하면 이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요소는 딱 2개로 정리된다. ‘사람’과 ‘예술’이다. 나는 이 둘을 “내가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들”이라고 부른다.
돈이 곧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삶의 컨트롤 키를 뺏겨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다만 돈이 얼마나 귀한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내가 번 돈을 나를 위해 소비하면서도 주변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이를 통해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 통장이 있으나 마나 했던 시절, 나를 위해 기꺼이 자기 지갑을 털어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보답할 차례다. 은혜 갚은 까치가 되어 무수히 받았던 ‘좋아요’를 돌려줄 때가 왔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고통은 막막한 절망의 늪에서 그저 허우적대다 소외되었을 것이다. 이게 다 돈이 없지는 않고, 철이 안 들지는 않은 덕분이다. 지난 세월이 내게 선물해준 지혜다.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이미 꽤 갚았다. 현재 스코어 나쁘진 않은 인생이었구나 싶은 증거다. 장하다. 배순탁. 열심히 살아줘서, 참 고맙다.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