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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에세이를 만나다
내 통장에 새겨진 상처의 무늬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8명의 작가에게 들어봅니다.
글 정여울, <비로소 내 마음의 적정 온도를 찾다>, <끝까지 쓰는 용기> 저자
나는 걸핏하면 물건을 잃어버린다. 작은 소지품들은 저마다 발이 달렸는지 곧잘 내 곁에서 영영 사라져버린다. 잃어버린 많은 것 중 유독 안타까운 건 통장이다. 통장은 단지 입출금내역의 기록이 아니라 매우 정확한 ‘사건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일기는 감정으로 기억을 왜곡할 수 있지만 통장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알려주니까.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준 내역, 월세나 전세금이 정확하게 빠져나간 날짜, 온갖 공과금과 세금이 무사히 빠져나간 흔적까지도. 통장은 내 모든 일상의 디테일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통장을 보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내 ‘잃어버린 통장의 역사’ 첫머리엔 뜻밖에도 아픈 기억이 있다. 첫 번째 통장을 만들러 가는 날은 설레고 기쁜 날이었을 듯하지만, 그 추억은 난데없는 설움으로 얼룩져 있다. 아홉 살이나 열 살쯤이었을까. 나는 어디선가 ‘통장을 만들어야 돈을 저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은행으로 직진했다. 하지만 신분증도 없는 나에게 어떻게 통장을 만들어 주었겠는가. 그 때 난 나만의 통장을 만들어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돈이 뭔진 몰라도 ‘자유를 향해 떠나는 티켓’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엄마 허락 없이 무작정 은행에 가 통장을 만들겠다고 비장하게 결심했던 그 순간은 미치도록 설렜다.
은행 창구 앞에서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직원은 나와 애써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손님인 나만 남았는데도,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과 차가운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저기요, 통장 만들러 왔는데요’ 라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녀의 냉대는 ‘너는 내 손님이 아니야, 너 같은 아인 상대하고 싶지 않아’ 라는 메시지를 또렷이 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통장의 기억은 ‘만들기도 전에 잃어버린 느낌’으로 남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느낌의 뿌리를 알 것 같았다. 바로 ‘어린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지 못했다’는 상처와 두려움이 싹튼 것이다.

그 분이 어린 나에게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집스럽게 눈을 내리깔고 내 눈을 피하면서 차가운 기운을 전할 에너지로, 3초만 나를 바라봐주었다면. ‘얘야, 신분증이 없으면 통장을 만들 수 없어. 다음에 부모님과 함께 오너라’ 라고만 말해 줬다면. 내 기억 속 ‘첫 번째 잃어버린 통장’은 사실 ‘만들지도 못한 통장,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는 통장’이었다. 그 일을 되짚으며 ‘어린이의 감정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마음 깊이 생각했다.
잃어버린 통장의 역사 중 두 번째는 중학생이 돼 처음 만든 통장이다. 그 통장에 용돈을 꼬박꼬박 모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나는 2년간 열심히 모은 돈으로 내 생애 첫 오디오를 샀다. 매일매일 새로운 엘피 디스크를 올려놓고 음악의 감성을 키우던 시간. 한 달에 2만원씩 적금을 부어 마련한 나만의 오디오는 ‘어른이 된 것 같은, 성장의 기쁨’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물건이었다. 그 통장을 잘 간수해 둘 걸,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나만의 통장이 생기는 기쁨을 처음으로 알려준 그 통장,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열심히 용돈을 모았던 그 통장은 또렷한 추억으로 각인돼 있다.
내가 잃어버린 세 번째 통장은 ‘마지막 종이통장’이다. 온라인뱅킹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종이통장을 쓰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서랍 깊숙이 넣어둔 마지막 종이통장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만약 지금 ‘통장정리’를 하면 책 몇 권 분량이 나올 정도로 두꺼운 통장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입출금통장을 종이로 잘 쓰지 않는 지금, 가끔 종이통장의 따스한 느낌, 아주 작은 책처럼 내 인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듯한 통장의 질감이 그리워진다.

이상하게도 ‘잃어버린 통장의 역사’를 쓰다 보니 아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이 글을 쓰면서 이유를 깨달았다. 모든 통장엔 저마다 피할 수 없는 상처의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돈을 벌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간의 아픔, 어렵게 번 돈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헛되이 써버린 듯한 안타까운 느낌. ‘월급은 통장을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유머러스한 한탄을 우린 모두 ‘웃픈’ 심정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 모든 괴로움에도 우리가 또다시 잃어버린 통장의 역사를 더듬는 건, 내 마음 속 ‘통장정리’가 바로 ‘내가 지금 이곳에 살아있음의 뜨거운 확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지런히 생을 꾸려가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 삶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가꿀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희망. 바로 그것이 내 잃어버린 통장의 역사를 더듬어보며 느낀 애틋한 기쁨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