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bank

돈, 에세이를 만나다
고맙고, 미덥고, 치사하며 쓸쓸한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8명의 작가에게 들어봅니다.
글 김애란 , <바깥은 여름>, <비행운> 저자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 버리는 것 같아요”

언젠가 한 단편에 위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주인공이 옛 연인이 알려준 노래 , 길 이름, 저자명 등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내게도 그런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러시아 화폐 단위 ‘코페이카(копейка)’다.

고등학생 때 『죄와 벌』을 읽으며 ‘코페이카'를 처음 알았다. 그래서 몇 해 전 방문한 러시아에서 지갑을 열 때마다 도스토옙스키가 생각났다. 강바닥에 물그림자 아른거리듯 내게 처음 ‘코페이카’라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

‘즈워티(Zlotych)’란 말을 처음 알려준 이는 폴란드의 과학자 마리 퀴리다. 초등학생 때 『마리 퀴리』 전기를 읽다 ‘즈워티’란 말을 처음 익혔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녀가 훗날 폴란드 화폐의 모델이 되었다는 문장을 통해서였다. ‘사람들은 왜 차가운 화폐에 사람 얼굴을 새길까? 그것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갸웃거리다 지폐 속 마리 퀴리의 깊은 눈을 빤히 바라본 기억이 난다.
내게 한국 화폐 ‘원’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어머니다. 나는 그 말을 활자가 아닌 소리와 감촉으로 먼저 익혔다. 시골 소읍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한 엄마가 입에 달고 산 말이 바로 저 ‘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카드를 잘 쓰지 않았고, 특히 우리 소읍에서는 모든 ‘계산’을 현금으로 했다. 우리 가게 찬장에는 플라스틱 소재의 둥근 동전 바구니가 있었고, 어머니는 거기서 잔돈을 꺼내 손님들에게 거슬러주곤 했다. “천오백 원입니다”, “삼천 원입니다”, “이만 원입니다.”, “혹시 천 원짜리 한 장 없으세요?”라는 식의 말을 반복하면서.

네 살 때부터 나는 그 활발한 매매 활동 가운데서 자랐고, 어른들에게 식대며 담뱃값을 받고 잔돈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국수 가게 한쪽에 쌓인 국산 담배 이름과 가격을 한글도 떼기 전에 줄줄 외웠다.
우리 자매가 유치원생이 됐을 무렵, 엄마는 새 모이 주듯 우리에게 매일 백 원씩 주곤 했다. 우리는 그 돈을 받자마자 구멍가게로 달려가 군것질거리를 샀다.

집밥과 달리 혀를 녹이는 공산품의 맛도 유혹적이었지만, 우리가 화폐라 약속한 어떤 물체를 내밀면 저쪽에서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주는 행위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다 백 원이 삼천 원이 되고, 만 원, 삼만 원으로 올랐을 때 나는 이미 갖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게 많아 잠을 설치는 사춘기 소녀가 되어 있었다.

과거를 생각하면 그런 번뇌의 밤보다 차갑고 반짝이는 백 원의 감촉과 화폐의 무게, 교환의 실감이 먼저 떠오른다. 요즘처럼 자식에게 ‘금융교육’이라 할까, 지식을 전하는 문화도, 자원도 없는 시대에 그래도 내게 뭔가 가르치려 한 엄마의 작은 결단과 행위도.

그 뒤 대학에 들어가서 생애 첫 통장을 만들었다. 학교 앞 은행에서 대학 등록금을 부치며, 생전 처음 만져보는 큰돈에 가슴이 쿵쾅거린 기억이 난다. 만에 하나 실수로 그 돈을 날리면 ‘인생이 끝날 것 같아’ 주위를 끊임없이 두리번거린 내 숫된 얼굴도.

아마 내겐 그게 다른 어떤 돈도 아닌 엄마가 “삼천오백 원입니다”, “칠천 원입니다”, “또 오세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차곡차곡 정직하게 모은 돈이라 그랬을 거다. 물론 한참 뒤 스스로 돈을 벌고, 홀로 전세금을 치를 때에도 ‘내일 전쟁이 나면 어쩌지?’, ‘은행가는 길에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따위의 망상에 똑같이 시달렸지만.

오래전 내 작은 손바닥에 놓인 동전 한 닢이 어엿한 아라비아 숫자가 되고, 몸을 불려 갈수록 어릴 땐 보지 못했던 엄마의 노동과 수치, 보람과 환멸을 가늠하게 됐다.
얼마 전, 집에서 10년 넘은 통장 꾸러미를 발견하고 그 내역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 낡은 40여 개의 종이통장 안에는 사회초년생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느낀 초조와 불안, 희망, 효심, 우정, 미래를 향한 기대 같은 게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로 빼곡 박혀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은 돈과 부친 돈, 조의와 축의, 대출과 이자, 고료, 월급, 막 쓴 돈과 값지게 쓴 돈, 우울, 사치, 기쁨 등이 모두 새 발자국처럼 찍혀 있었다. 실로 돈은 내 앞에 늘 여러 얼굴로 나타났다. 나를 돕고, 나를 등 떠밀고, 나를 버티게 하고, 나를 못 견디게 하며, 나를 위로하는 식으로 다가왔다 사라졌다.

‘그래, 돈은 지금도 그렇지. 고맙고, 미덥고, 치사하며, 쓸쓸하고… 그래, 그렇지’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다 쓴 종이통장을 잘 버리지 못한다. 왠지 그 통장이 러시아 소설처럼 ‘원’으로 쓰인 전기 같아서다. 첫 장을 열면 지은이가 나오고, 본문 안에는 수치와 비밀이 새겨진, 저자와 독자가 동일한 어떤 책으로 느껴져서다.

앞으로 이 안에 또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아마 좋은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모두 있겠지. 우리의 삶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내 미래가 궁금해 먼 곳을 보다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돈’과 눈을 마주치고는 괜히 깜짝 놀라 딴청을 피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좋은 일만 생기란 듯이. 부디 그래 달라는 듯이. 혹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견딜 만한 크기로 다가와 주길 빌면서.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