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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에세이를 만나다
태초에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다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8명의 작가에게 들어봅니다.
글 남궁인 , <만약은 없다>, <제법 안온한 날들> 저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아니, 둘은 거의 같은 말이나 다름없다. 잘 들어라. 주식을 사면 그 돈은 입에 들어간 업진살처럼 살살 녹아서 사라진다. 주식을 사는 동시에 모든 재산이 증발해서 한 푼도 남지 않고 길거리에 나앉을 것이다. 인생에서 단 하나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면 주식을 사지 않는 것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이건 내가 유일하게 받은 경제 교육이었다. 지갑에는 떡꼬치 사 먹을 돈 오백 원도 없었다. 주식이 종이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무형의 상징으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가 왜 저렇게 성을 내는지 아리송했다.

더불어 어머니의 경제교육은 많은 면에서 혹독했다. 돈을 죄악이나 탈선과 연결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용돈이 없어 대학 입학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비굴하게 자랐다. 그 나쁘다는 돈이 참 가져보고 싶었다. 몸에 나쁜 음식이 달고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런 교육을 받았는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른들이 주식을 하다가 말아먹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국밥처럼 말아먹을 수 있는 것임은 분명했다.

식탁에선 가까운 친척 누군가가 주식으로 재화나 재물을 얼마나 많이 말아먹었는지 끝없이 회자되었다. 부모님의 지인과 사업 파트너로 이야기를 확대하면 주식은 그야말로 타인의 구강 안에 들어간 업진살이었다. 그 대화에서 매번 떡꼬치 수만 개가 사라졌고, 주식은 어른들의 혀 위에서 길거리행 특급열차 티켓이었다. 정점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머니는 '경제 교육'을 아버지에게 해야 했다. 아버지 대신 나를 가르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투자에 있어 신기할 정도의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돈이 뭉텅이로 사라졌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희망을 강조했지만, 아이들은 다가오는 위기에 민감했다.

내가 성장하면서 당신은 차근차근 사업과 주변 사람들의 신의를 날려 먹었다. 끝내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공중분해 되고 우리는 전셋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나는 어른들이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로 한다는 사실을 배우면서 자랐다.

어머니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당신은 늘 위태롭던 배우자에게 질려 그들을 의사와 법조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두 아들은 말을 잘 들었다.

첫째인 나는 정말로 의사가 되었다. 둘째는 법조인을 목표로 문과로 진학했지만 어쩌다 경제학을 전공했다. 동생은 금융계의 정해진 코스를 밟아 지금은 국가가 설립한 회사에서 국가 자산을 운용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운용하는 자산 규모가 몇 조 정도 된다(고 들었다). 당연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주식을 산다. 이런 걸 보면 때로는 가정 교육은 참 무용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다. 월급을 받기 시작한 나는 주식을 비롯한 모든 투자에 관심을 끄고, 정기 예금 통장으로 이자를 받는 데 만족했다. 가장 큰 모험은 모든 예금을 모바일 은행으로 옮긴 정도였다.

자그마치 13년. 같은 기간 동안 코스피 지수는 세 배 상승했고, 미국 주가지수는 네 배 올랐다. 나는 이제 어머니 말씀을 어길 때가 왔다고 생각했고, 동생에게 주식을 사겠다고 말했다.
운용 자산 160조가 넘는 투자 회사에 다니는 동생은 형의 고백을 듣고 제육볶음이 있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형이 말하는 걸 들으니 국내외 투자 시장은 큰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미국 대공황 직전 구두닦이가 주식을 사겠다는 걸 듣고 금융계 대부가 주식을 팔아서 횡액을 모면했다고 했다.

국가의 손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동생은 투자를 줄이고 개인적으로 보유한 주식도 팔겠다고 했다. 나는 은유적으로 구두닦이가 되어 기분이 상했다. 그럼에도 주식 시장의 활황이 계속되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주식 앱을 설치하고야 말았다.

빨강은 상승이고 파랑은 하락이라는 것 외에는 모든 게 생소했다. 내 맘대로 안정적 투자를 원칙으로 삼고 나름대로 코스피 시가 총액 순위대로 투자했다. 큰 기업일수록 안전하다고 누가 그런 것 같았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아버지처럼 내게도 신기할 정도의 수완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시총 1위 기업은 내가 투자한 뒤 시총 100조가 증발했다. 시총 2위 기업은 투자 뒤 시총 20조가 증발했다. 시총 4위 기업은 투자 뒤 시총 10조가 증발했고, 물타기를 했더니 추가로 10조가 더 증발했다. 지금은 시총 순위가 달라졌을 정도다. 나는 제법 큰 부채 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두 번째 원칙을 세웠다. 관련 업계의 주식을 사야만 성공한다고 누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병원 레지던트들이 미국의 백신 회사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에도 제법 수익을 봤고 백신이 승인되면 추가로 폭등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두 번째 원칙에 의거해서 미국의 바이오 주에 투자했다. 그 백신은 순조롭게 승인되었고 이후 회사 시가 총액의 80%가 증발했다. 너무 충격적인 수치라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미국의 한 주식 칼럼니스트는 이 폭락을 '기이한 사건'이라고 불렀다.(정말이다)

그나마 나에게는 투자 전문가인 동생이 있었다. 그는 내게 금 장기 투자를 권했다. 동생 말을 잘 듣기 위해 따로 계좌를 개설하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금에 투자했다. 금 시세는 그럭저럭 내게 호의를 보이며 폭락하지 않고 버티다가 어느 날 갑자기 3퍼센트나 상승했다.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빨간불에 놀라 허둥지둥 금을 다 팔았다. 다음 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금은 당장 10퍼센트가 추가로 상승했다. 소식을 전하자 동생은 수화기 너머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수저에 올려둔 오징어볶음을 다시 밥그릇에 내려놓으면서.

태초의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온전히 삶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었다. 13년간 적금과 예금만 했으니 1년을 더해 14년간 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신기할 정도의 수완은 꼭 입증해야 하는 인생의 과업은 아니다. 내겐 안전한 예금만이 남았다. 친구는 신기하게도 원금이 보장되고 수익도 나는 정기 예금이란게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가만, 그런데 이 원고, 고료가 얼마였더라. 어디보자, 추가 매수를…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