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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에세이를 만나다
순수의 시절, 나의 통장 이야기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8명의 작가에게 들어봅니다.
글 김광민(피아니스트)
“김광민 씨, 창구로 오세요. 김광민 씨.”

네 살의 김광민 어린이는 후다닥 창구로 달려갑니다. 은행 창구는 아이의 키보다 아득히 높습니다. 아이를 발견하지 못한 은행 점원은 계속 이름을 부릅니다. 한 손을 번쩍 창구 위로 들어 여기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차례를 놓쳐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은행 점원이 불러주는 ‘씨’라는 호칭은 언제 들어도 누가 옆구리를 간지럽힌 것처럼 “크크크” 웃음이 나게 합니다.

아들에게 저축 습관을 길러주고 싶던 어머니는 제가 네 살 때 ‘김광민’이라는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주신 몇 원을 들고 은행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돈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마음 졸이며 고사리손에 돈을 꼭 말아 쥐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 넣은 채 잰걸음으로 은행을 향했던 기억이 납니다.

뭔가 감추고 있거나 화장실이 급한 꼬마로 보였을 겁니다. 실은 돈이나 저축의 개념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돈을 잃어버리면 엄마한테 단단히 혼난다고 생각했죠.
은행에 다닌 지 3개월쯤 됐을 때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창구에서 ‘김광민 씨’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구 앞에 서니 이전에는 없던 야트막한 발받침이 생겼더군요. 그날 처음으로 은행원 누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네가 광민이구나.”

은행원 누나가 활짝 웃으며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뒤로 은행에 가는 건 설레는 일이 됐습니다. 발 받침 위로 올라가 까치발을 들고, 창구에 팔을 괸 채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몇 살인지, 집은 어디인지, 어떤 과자를 좋아하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을 테죠.

은행에서 제 순서가 돌아오면 은행원 누나는 ‘김광민 씨, 창구로 오세요’라고 또박또박 말해 주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항상 같은 말로 제 순서를 불렀습니다. 아마 제가 그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한 날, 정기예금 통장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형이었는지, 이모였는지 친척 중 누군가가 ‘정기예금은 아주 좋은 것’이라고 한 말에 솔깃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면 목돈이 돼 있을 거라고, 2만 원을 넣으면 6년 뒤엔 7만 원이 될 거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6년이 지났습니다. 매달 꾸준히 넣은 돈에 이자가 붙어 놀랍게도 2만 원이 정말 7만 원이 됐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이 500원, 대학 등록금이 40만 원이던 시절이니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소년에게 7만 원은 생전 처음 가져본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악기를 살까? 자전거를 새로 살까? 아니면 신발을 하나 살까?’

결국 근사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가장 가까운 친구 둘을 불러 말로만 듣던 비싼 고깃집에 데려갔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친구들 얼굴 앞에 흔들며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고 허세도 부렸습니다.

그 돈을 한 끼 식사에 다 쓸 건 아닐 텐데. 열아홉 남자애가 하는 짓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빈털터리가 되어 식당에서 나온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3 겨울의 찬바람은 사람을 헛헛하게 만듭니다. 스무 살 이후의 삶을 예상하기 어렵지만, 생의 특별한 분기점에 있는 것만은 분명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어른이 될 준비는 되지 않았다고 느끼던 그때. 텅 빈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가 절실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나왔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지극히 1차원적이지만, 맛있는 걸 배불리 먹자는 아이디어는 열아홉이라는 나이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에게 보답했다는 기분이 들어서 더 좋았습니다.
돈 모을 일이 있거나 큰돈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 해묵은 기억들이 떠오르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통장잔고와 상관없이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부자라고 우겨 볼 수 있으니까요.

모바일 금융거래가 익숙한 요즘 세대는 저축이나 송금할 때 이모티콘을 함께 보낸다고 하죠. 저도 가끔 그런 이모티콘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요즘 세대에게는 저 귀여운 그림이 방긋 웃어주던 은행원 누나, 한겨울 친구와 함께 간 고깃집이 되겠구나 하고요. 먼 훗날, 예전 기억을 떠올렸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